유서들

34-11 =

hijackedlife 2020. 5. 1. 22:45

4월 30일. 어제는 아빠가 사업장을 정리하셨다. 5월 1일. 오늘은 친오빠의 34번째 생일이다.

 일하다 권유받은 커피 때문인지, 유난히 트라우마를 자극하던 악의없는 사람들 때문인지 나는 탈이 제대로 나서 공복으로 얌전히 잤지만 오늘 아침에까지 복통은 여전했다. 더 심해진 것 같았다. 배도 아파 죽겠는데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왁 토해버릴 것 같았다. '배아파'를 가장 많이 말한 사람 순위를 매길 수 있다면 아주 높은 점수일 것이다. 

오늘은 오빠 생일을 맞아 한강에 가서 텐트를 치기로 했다. 한강에 놀러가기, 텐트 치기 모두 해본 적 없었다. 우리 가족, 내 가까운 친구들도 그런 활동을 잘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 절대 빠질 수는 없었다. 화면으로만 보기 지겨워지던 풍경의 일부가 되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텐트도, 새언니가 해온 음식과 케익도 맛있었다. 엊그제 만난 설희씨가 밤에 전해준 김치만두도 함께였다. 배가 아팠지만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새언니표 김밥

 

아빠와 축구

 

이 모든 행사는 전적으로 새언니가 이루어낸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빠의 생일을 평생 지켜봐왔지만, 아마도 그에겐 최고의 생일이 아닐까? 구름이 있었지만 해를 완전히 가리지 않아서 날씨가 참 좋았다.

단란한 가족은 아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고, 떨어져있을때 서로를 가장 사랑한다는 걸 안다. 거리가 있다. 이제는 그게 지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시간만은 친했다. 새언니의 노력이 일궈낸 시간이다. 아빠와 공을 차 본 적이 있나?

 

 

식당 밖에 있던 설치미술

다같이 식당에 가서 고기를 구웠지만 나만은 먹을 수 없었다. 생일은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당사자에게 가는 날이다. 그리고 당사자를 알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기회 중 하나이기도. 나는 오빠에게 질문했다. 인생에 있어 터닝포인트가 됐던 3개의 지점을 말해달라고. 

1. 중학교 1학년 유상훈이라는 친구가 있었어. 키도 작고 실없는 얘기나 같이 하는 애였어. 어느날은 야한 잡지를 가져와서 보여주더라. 그 때 그런 걸 처음 봤어. 근데 첫 중간고사때 걔가 반에서 5등인가를 하더라. 나는 거의 꼴찌였어. 걔 때문에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래서 다다음 시험때는 반에서 3등. 남자 중에선 1등을 했어. 그 때 공부를 시작했지.

2. 대학교 1학년 때 의대에 적응을 잘 못했어. 기숙사 생활도 힘들었고. 근데 헌구라는 친구가 절망적인 삶에서 죽음을 택하다(맞나?) 라는 책을 추천해줬지. 그때 그 책에 깊이 빠져들었어. 책에게 많이 위로받고. 그 이후로 책을 많이 읽기 시작했어.

오빠는 엄청난 독서광이다. 특히 죽음, 살인에 관한 책이 많아서 오빠가 범죄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3. 성경이 만난거. 선을 30번은 봤어. 뒤늦게 연애도 해봤지. 하지만 다 어딘가 계산적이게 되더라, 내가. 기브 앤 테이크를 따졌어. 그래서 결혼은 남 얘기 같고 그랬지. 그런데 성경이는 그렇지가 않았어. 계산하게 되질 않더라. 그리고 성경이와는 말도 계속 할 수 있었어. 

새언니가 고른 오빠의 3가지 매력

1. 오빠는 똑똑해요. 어떤 식으로요?말을 잘 한다거나, 지식이 많다거나..여러 종류의 똑똑함이 있잖아요. 다요. 언니는 세상을 이분법으로 많이 봐왔던 것 같아요. 이거 아니면 저거. 오빠는 새로운 사고를 열어줬어요. 이제는 세상을 좀 다르게 봐요, 오빠 덕분에.

2. 귀여워요.

3. 다정해요.

엄마가 뽑은 오빠의 매력

태환이는 ... 아 뭐라고 했지?기억이 안 나. 유통기한이 지났나보다.

아빠가 뽑은 오빠의 매력

태환이는 한가지에 꽂히면 그것에 정진한다. 지구력이 좋아. 끈기.

내가 뽑은 오빠의 매력

오빠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아마 아는 게 많고 사람의 속성을 잘 파악하는 기민한 촉 덕분인가 싶은데, 가장 큰 공헌은 오빠의 편견 없음에 있지 않나 싶다. 사람이 상처를 받으면 또다시 상처받는 걸 피하기 위해 편견을 만드는게 본능인지라 그것을 거스른 사람들을 나는 높이 산다. 오빠도 편견이 있겠지만 드러내서 사람을 상처주는 일은 없다. 편견이 없기에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속단하지 않는 설득의 자세를 취한다. 

다들 내 말이 맞다며 오빠를 칭찬했고 오빠는 비행기 태워줘서 고맙다고 했다. 오빠도 나와 가까운 사람은 아니다 분명. 그래도.. 난 오늘 또 내가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시간에서도 계속 눈물이 나려고 했다. 내가 남기고 갈 수 있는 건 이런 것 뿐인 것 같다. 불현듯 삶이 끝나버릴 것 같은 떄가 종종 있다. 혼자 있을 때만 그런 건 아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도, 어떤 바람이 마음을 훅 쓴다. 긴 우주의 찰나를 살아가고 있구나. 느낄 때면 주변의 모든 것들이 연약해보인다. 하지만 가끔은 단지 내일이 온다는 사실만으로 너무나 큰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삶을 돋보기로 보기도, 아주 멀리서 조각난 띠처럼 보기도 한다. 내 의지는 관여하지 않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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