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들

죽음을 처방받다

hijackedlife 2020. 8. 5. 00:43

죽을 것 같았다. 죽음을 직면했을 때 가장 힘들었던 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자신이었다. 나는 아직 죽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몸이 아프고 죽을 것 같을 때마다 괴로웠다. 죽음이 두려웠다. 하지만 계속 아프면 결국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나 또한 그랬다. 죽음을 인정했고, 내 삶을 돌아봤다. 찬찬히... 어릴 적부터. 어렸을 때 난 화가나 가수가 되고 싶었다. 나와 부모님은 그 시절의 나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내가 꿈꿨던 것들을 손에 넣어, 큰 가치를 못 느끼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것은 갈망이 사라진 상태, 즉 소망을 성취한 상태다. 난 그랬다. 죽지 않고, 쉬지 않고 꿈꾸고 이루어냈다. 정말 감사한 삶이다.

사랑 또한 해보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지만, 난 그때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J에게 고맙다. 나는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사랑을 했다. 진저리 나게 아픈 나로 인해 끝났지만, 그 시간들은 아주 명백한 색으로 내 안에 존재한다. 

죽어도 좋아. 죽어도 괜찮아. 후회되는 건 없어. 하지만 꼭 죽어야 한다면, 만든 노래만큼은 내고 싶다. 어디에든. 누가 들어도 좋으니 누군가. 내가 사랑했던 것들을 남기고 싶어. 

죽음을 앞에 두면 모든 것들이 가벼워진다. 그 느낌은 괴롭고도 편안하다. 부푼 꿈을 안던 마음은 사라졌다. 인간의 몸이라면, 뭐든 필히 해낼 수 있다. 인간은 위대하다. 내 몸은 신기한 것이다. 예전에 나를 괴롭히던 사건, 인간들도 지금은 그저 스러져 갈 무언가로 보인다. 

죽음은 하나님이 내게 내린 처방이다. 삶에 압도되지 말라고. 일본에 있을 때 이런 소원을 빌었다. 그 생각에 동의하는 자가 지구에 한 명도 없더라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 수 있다면, 내 육신에 더 바랄 것은 없다고. 나는 지금 그렇다. 생의 본질을 알게 됐다.

그만큼 생에 가치 또한 느끼지 못하게 되었지만 적어도 하루하루 나를 위해 살 거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물셋을 먹어가며 남을 먹여살릴 궁리를 깊게 했다.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한 날 나는 기도했다. 지금껏 해온 기도와는 사뭇 달랐다. 합격하게 해주세요, 열심히 하게 해주세요, J가 이 날을 완벽한 날로 기억하게 해주세요, 낫게 해주세요, 평화롭게 해주세요 ... 그런 게 아니었다.

그냥 고맙습니다. 아픈 거 괜찮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시점부터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을 받은 것이니까. 이제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감사합니다. 무엇도 저주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어요. 고맙습니다. 죽어도 괜찮습니다. 데려가세요. 하지만 죽이지 않으신다면 그것 또한 고맙습니다. 남은 날을 감사로 살아나가겠습니다. 아멘.

골반 이형성증이 있다고 들은 날도, 그렇게 억울하거나 당황스럽지 않았다.

지금도 허리가 아프고 심장이 뛰고 메스껍지만, 이렇게 글 쓸 수 있음에 감사하다.

인간의 몸은 정말 대단하다. 사유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노래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그건 오직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

내 안에 깃든 신의 조각.

무엇도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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